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문단 편집) === 창단 ~ 1990년대 === 창단 이후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던 주요 선수들 ▶[[차초]]: 커리어 16년 중[* [[스페인 내전]]으로 3년 제외.] 14년을 데포르티보와 함께 한 클럽 초창기의 레전드.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월드컵]] 스페인 대표팀 멤버 중 유일한 데포르티보 소속 선수였으며 당연히 데포르티보 최초의 [[FIFA 월드컵]] 출전 선수이기도 하다. ▶[[루이스 수아레즈(스페인)|루이스 수아레즈]]: [[FC 바르셀로나]]와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레전드로 유명한 스페인 국적의 미드필더. 데포르티보 유스 출신으로 53/54 시즌 한 시즌 몸담은 후 이적했다. 데포르티보에서 선수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활약했다. ▶ [[아만시오 아마로]] : [[레알 마드리드 CF|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인 아만시오 아마로는 데포르티보에서 데뷔했다. 데포르티보에서 네 시즌을 뛰었고 승격에 크게 일조했다. 이를 지켜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직접 지목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시킬 만큼의 재능이었다. 이후 금빛 화살 디 스페타노와 함께 활약했다. ▶[[프란 곤살레스]]: 레알 마드리드의 이적 제의까지 거절하며 축구 인생 모두를 데포르티보에 바친 레전드. 데포르티보 유스 팀 출신으로 1988년 1군 승격되어 2005년까지 17년 동안 활약했다. 데포르티보의 10번이자 주장으로서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스피드가 아닌 테크닉, 패스에 의존하던 재간둥이 스타일의 윙어였고 스페인 대표로 유로 2000 출전 및 A매치 16경기 2골을 기록했다. 은퇴 후엔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코칭을 배우고 있으며 아들 니코 곤잘레스는 [[FC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망주 중 한명이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위약금 파문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데포르티보를 강등으로 내몰 뻔한 사건 이후로 다수의 팬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 그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좋아하진 않는다는 반응이 주다. 애증의 존재로 전락한 셈. ▶[[미로슬라프 쥬키치]]: 세르비아 국적으로 90년대 라리가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하나였다. 구 유고 연방 및 세르비아에서도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쥬키치의 페널티킥(El penalti de Djukic)으로 매우 유명하다.[* 93/94 시즌 데포르티보는 바르셀로나와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데포르티보는 1위, 바르셀로나는 당시 2위였다. 바르셀로나는 무조건 이긴 후 데포르티보가 무승부 내지 패배하길 바래야만 했던 상황. 데포르티보는 발렌시아를 상대로 예상 외로 고전을 거듭했다.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경기 종료 직전 0:0 상황에서 베베투가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우승이 걸린 최종 라운드, 그것도 경기 종료 직전에 기적같은 기회가 찾아왔던 것. 원래 페널티 전담 키커였던 베베투는 부담감 때문인지 다른 선수에게 양보했고 결국 쥬키치가 키커로 나서게 됐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나 싶었으나 듀키치의 킥은 너무나 정직했고 결국 데포르티보는 우승을 코앞에서 놓쳤다. 지금도 쥬키치는 스페인에서 페널티킥하면 나쁜 의미로 많이 언급되는 선수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1997년부터 2003년까진 발렌시아에서 활약하며 두 클럽의 전성기를 함께 했다. 은퇴 후엔 세르비아 U-21 대표팀, 세르비아 성인 대표팀을 비롯해 스페인의 바야돌리드, 발렌시아, 에르쿨레스, 코르도바의 지휘봉을 잡았다. 감독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편이다. ▶[[파코 리아뇨]]: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데포르티보의 골문을 지켰던 골키퍼. 스페인 대표팀 경력은 없지만 전성기 시절엔 상당히 뛰어났던 수문장이었다. 92/93 시즌과 93/94 시즌 무려 두 시즌 연속 라리가 최우수 골키퍼(사모라 상)로 선정되었다. ▶[[베베투]]: [[호마리우]]와 투톱으로 뛰면서 1994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아기 안기 세레모니로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데포르티보 레전드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데포르티보 소속으로 131경기 출장 86골을 기록했다. 베베토의 조상은 데포르티보의 연고지인 갈리시아 출신이었다. 활약도 활약이지만 갈리시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팬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데포르티보 팬들의 가슴 속엔 [[호마리우]]보다 위대한 스트라이커. ▶[[마우로 실바]]: [[페르난도 레돈도|레돈도]], [[펩 과르디올라|과르디올라]]와 함께 90년대 라리가 수비형 미드필더 삼대장. 왕성한 스태미너와 투철한 프로 정신으로 만 37세까지 데포르티보의 중원을 든든히 받쳐줬다. 전투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평. 여기에 라리가에서 가장 많이 공을 뺏으면서 가장 적게 뺏기는 선수라는 칭찬도 들었을 정도로 볼을 다루는 능력이나 패스 능력도 좋은 편. [[클로드 마켈렐레|마켈렐레]]가 한창 레알 마드리드에서 대활약을 때도 적지않은 이들이 마우로 실바가 우위에 있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마켈렐레는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다. 단, 마우로 실바를 제외한다면 말이다."라는 식이었다.][* 물론 마켈렐레역시 수비형 미드필더로는 역대 최고를 논하는 수준이다. 마우로 실바와의 비교는 마우로 실바의 활약이 대단한만큼 그를 향한 데포르티보 팬들의 애정이 묻어있는 찬사로 봐야한다.] 데포르티보 출신으로 자타공인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월드 클래스 선수. 다만 공격 축구를 사랑하는 브라질의 특수성으로 1994 월드컵 주역임에도 젊은 시절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전문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의 중요성이 늘어난 최근 재조명 받는 중. 2018년 구단 공식 투표를 통해 데포르티보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보로 곤살레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데포르티보의 수비 주축으로 활약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발렌시아에서 보냈지만 전성기는 데포르티보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데포르티보에서의 활약으로 1994 미국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선수 은퇴 이후 고향팀인 발렌시아오 돌아가 코치 및 감독 대행으로 활동 중이다. ▶[[도나토]]: 브라질 출신의 중앙 수비수 및 수비형 미드필더이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후 1993년 여름 데포르티보로 이적했다. 데포르티보로 이적한 후 전성기를 맞이하며 스페인으로 귀화해 12경기 3골을 득점했다. 유로 96 당시 스페인의 10번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말년엔 중앙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해 데포르티보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우승 당시 만 36세임에도 29경기 3골을 터트렸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투철했다. 02/03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고 이후에도 친정팀의 연고지인 아 코루냐에 거주 중이다. ▶[[클라우디오 바라간]]: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던 스트라이커. 베베투와 함께 투톱을 이루며 구단의 첫 황금기를 이끈 주역 중 하나다. 은퇴 이후 엘체의 수석 코치 및 감독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2부 리그 구단들의 지휘봉을 꾸준히 잡고 있다. ▶[[하비에르 만하린]]: 1993년부터 1999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한 공격수 및 윙어. 득점력은 떨어졌으나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로 상대 진영에 혼란을 가져다주는데 능했다. 스페인 U-20 대표팀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차근차근 밟은 엘리트로 유로 96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또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금메달을 따낸 코비 세대의 일원이다. 은퇴 후 데포르티보 유소년 코치 및 2군 수석 코치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라싱 페롤의 수석 코치다. ▶[[파코 헤메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던 중앙 수비수. 데포르티보 시절엔 유망주 혹은 로테이션 맴버로 활약했다. 1998년 여름 사라고사로 이적한 후 전성기를 구가하며 스페인 대표팀에도 발탁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다. 은퇴 이후 여러 구단들을 전전하다가 라요 바예카노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선보이며 주가를 올렸다. ▶[[누르딘 나이베]]: 1996년부터 2004년까지 8년 동안 데포르티보의 중앙 수비를 책임졌다. 터프한 수비의 대가로 당대 라리가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하나였다. 모로코의 축구 영웅으로 A매치 115경기 4골을 기록했고 2번의 월드컵에 출전 경력도 있다. 아프리카로 범위를 넓혀도 역대 베스트 11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선수. 아시아에서 홍명보의 위상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플라비우 콘세이상]]: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던 중앙 미드필더. 마우로 실바와 함께 데포르티보의 중원을 이끌며 99/00 시즌 우승을 견인했다. 이후 거액의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지만 폭망했다.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 44경기 4골을 비롯해 2번의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다. [[마르코스 세나]]가 플라비우 콘세이상과 자주 비교되었다. ▶[[무스타파 하지]]: 90년대 모로코의 판타지 스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맹활약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데포르티보에서 활약했지만 적응 문제 및 경쟁자가 하필 자우밍야였기 때문에 별다른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자우밍야]]: 브라질 출신의 희대의 테크니션. 화려한 발재간으로 큰 명성을 떨쳤는데 [[호나우지뉴]]가 떠오를 당시 제2의 자우밍야라고 불렀을 정도. 우리가 호나우지뉴를 통해 봤던 화려한 테크닉들은 이미 자우밍야가 먼저 했었다. 1997년 히바우두의 대체자로 영입되어 2004년까지 리아소르를 누볐다. 가장 큰 업적은 바로 1999-2000 시즌 [[데포르티보]]의 라리가 우승을 이끌었던 것. 화려한 개인기 외에도 뛰어난 플레이메이킹, 클러치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무엇보다 큰 경기에 매우 강했다. 그러나 01/02 시즌 기점으로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된다. 자우밍야가 나이가 많기도 했고 발레론이 플레이메이커로서 더 이타적, 안정적이었기 때문. 이루레타 감독은 자우밍야를 로테이션 맴버로서 상황에 따라 왼쪽과 중앙에 골고루 기용하고 싶어했다. 본인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훈련 도중 이루레타 감독에게 박치기를 시전하며 사실상 축구 인생이 끝나버렸다. 특히 월드컵 직전에 벌어진 사건이라 여파가 더욱 컸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었던 [[펠리페 스콜라리]]는 자우밍야의 행동에 매우 유감을 표했고 엔트리 발표 직전 [[히카르두 카카]]를 대신 선발했다. 또한 데포르티보에선 02/03 시즌 쫓겨나듯 오스트리아 리그로 임대를 떠나야만 했다. 은퇴 이후 데포르티보 실내 풋살팀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최근엔 브라질에서 거주 중. 하비에르 이루레타 감독과는 화해를 했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파울레타]]: 포르투갈 부동의 원톱 [[파울레타]]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년 동안 활약했다. 우승 멤버지만 존재감은 적었다. [[로이 마카이]]에 밀려 철저한 후보였다. 2000년 여름 [[디에고 트리스탄]]이 합류하면서 보르도로 이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